상권 감상.
아키타 요시노부의 서부극.
건조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문체는 잘 살아 있지만, 옴니버스적인 구성 때문인지 특유의 선이 굵고 웅장한 서사는 느껴지지 않았네요. 솔직히 상권만으로는 작가 네임밸류에 비해 좀 실망스러운 느낌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삽화가인 야마다 우이로우(山田外朗)의 일러스트는 대단히 높은 수준. 마음에 들었어요. 왠지 이렇게 옆에 회사명이 들어가는 삽화가들은 신뢰가 안 가는 느낌인데, 이 양반은 컬러고 흑백이고 무척 정성들여서 예쁘게 잘 그렸...이름으로 검색을 해 봤을 정도면 말 다 했죠 뭐. 게임에서든 소설에서든 이 분의 그림을 좀 더 좀 더 보고 싶네요! 근데 검색해 보니, 주로 활동하는 분야는 니트로 키랄...그러니까 BL쪽이라고 합...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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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설명이 참 부족합니다. 서부 기반의 판타지인 것은 확실한데, 기초적인 고유명사에 대한 정보조차 던져주지 않고, 일단 내용을 진행 시키고는, 중간에 정보를 조금씩 툭툭 던져대는 스타일. 덕분에 읽기가 좀 난해한 면이 있어요.
뭐 원래 아키타 요시노부라는 작가 자체가 난해한 면이 강하긴 합니다만...
오펜 때부터 단순한 문장 하나 하나에 깊은 의미를 담아 곱씹게 만들고, 정보도 짜게 주고, 철학성에 집착하고...여러모로 독자 골 아프게 만드는 작가였지요. 평소에 비하면 그래도 이 작품은 그런 아키타식 난해함은 상당히 자제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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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좋은데...문제는 특유의 선 굵은, 웅장한 서사도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스토리에 흡입력이 부족했네요. 상권이라는 것도 있고...옴니버스 구성이라는 것도 흡입력에는 디메리트가 크고...음...어쨌든 작품의 분위기, 세계관, 캐릭터 같은 스토리 외 부산물에 관심이 크게 가지 않는다면, 저처럼 좀 애매한 느낌을 가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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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쫒는 복수극이라는 설정 자체는 참 좋은데, 제가 그런 설정을 좋아하는 이유인 격렬한 감정의 묘사가...아키타 특유의 드라이함 때문에 없다시피 합니다.
덕분에 복수극으로서의 개인적인 메리트는 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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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는...전체적으로는 서부극에 어울리는 적당한 하드보일드 함이 괜찮은 느낌이지만, 아키타식 부조리함이랄까, 짜증남이랄까, 그런 게 은근 달라붙어 있어서...좀 곤란한 느낌이었네요. 프래니가 대표적으로 문제였지요. 처음엔 되게 불쌍했는데, 갈수록 도틴, 크리오 등 아키타의 민폐의 계보가 떠오르게 했...마지막 그 성녀 돋는 짓거리는 대체 뭔데 임맠ㅋㅋㅋㅋㅋ그 때 진짜 빡쳐서....아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베티도 복수극의 주인공 치고는 은근히 답답한 면이 많고 말이죠....끙.
베티-프레니-윌리엄의 구도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묘사가 워낙 없어서 애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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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주인공의 상대 악역인 롱스트라이드와 빌리 콤비가 굉장히 인간미 넘치는 악역으로서 생생하니 내면묘사도 많고 좋은 느낌입니다. 되게 조무래기 악당스러우면서도, 확실하게 살아남으며 강자의 포스도 내뿜는, 그 모순적인 면모가 굉장히 좋아요. 이러다 복수극에서 원수를 응원하게 생겼...큰일났다! 베티 일행 좀 더 힘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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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분위기는...음...그렇지 않아도 건조하니 부스러질 것 같은 황폐함이 느껴지는 것이, 아키타의 문체인데...작품의 세계관마저 서부극 기반의 사막입니다...분위기도 하드보일드 지향입니다...선을 조소하는 무법시대입니다...건조해...삭막해...와...어울리긴 진짜 잘 어울리는데, 진짜 삭막함이 너무하다 싶을 때도 좀 있음...ㅋㅋㅋ
그래도 상권에서 가장 호감이 드는 것이, 이 분위기 연출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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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을 내자면 “스토리 평범. 캐릭터성 미약. 세계관은 조금 매력적” 정도?
옴니버스성이 너무 심했어요. 적당히 하드보일드한 서부 단편집이라는 느낌. 목적은 확실하지만(아버지의 원수를 갚아라!) 너무 빙 돌아간달까...다른 몰입시킬 떡밥 없이, 원수를 쫓는 여정사이 벌어지는 일들만 늘어놓고 있으니...
단편들 자체도 좀 밋밋한 느낌이었고요 –3-
하권 감상.
상권은 영 미묘했었는데, 하권부터 모든 면에서 급격하게 좋아지네요!
주인공 캐릭터들에 대해서 심도있게 파고들면서, 상권과 달리 훨씬 애정을 가지고 공감할 수 있게 되었고, 스토리는 확실하게 드러난 메인 스토리가 좋은 흡입력을 보여줬으며, 원래 마음에 들던 드라이하고 하드보일드한 작품 분위기도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윌리엄의 에피소드가, 취향 직격이었어요. 그 절제되었으면서도 끈적끈적한 애증의 묘사가 진짜...크윽! 시작부터 푹 빠졌고, 이후로 계속 마음에 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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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주인공 일행도 많이 분발했지만, 솔직히 읽으면 읽을수록 롱스트라이드&빌리 콤비 얘네가 주인공보다 더 주인공 같았네요. 악당이지만 애정이 가는 녀석들이었습니다. 뭔가 주인공 보정 같은 것도 이 녀석들이 오히려 받아 챙긴 것 같고...ㅋㅋㅋ 결국은 악역인지라 마지막에 진지하게 제대로 주인공과 대결하면서는, 결국 그런 버프 없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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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전히 아키타 씨는 대리만족에 짭니다. 주인공의 레벨 성장이 마지막까지 진짜...거의 없는 것이 참...너무 아키타 다워서...ㅠㅠㅠㅠ 솔직히 마지막의 승리는 기막힌 운빨일 듯...ㅠㅠㅠ 차라리 전차병으로는 쓸만해진다는 느낌이 드는데, 오히려 메인인 총잡이로서는 거의 성장하는 느낌이 안 드니, 이것 참...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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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병 하니 말인데, 사막에서의 고대병기(멜카바=전투)를 가지고 하는 전차전의 묘사가 참 좋았는데 말이지요. 무엇보다 3인 협동인지라...평소 잉여신세를 면치 못하던 베티와 프레니도 나름대로 활약을 한다는 것이 좋았던 것 같아요. 전차전의 비중이 더 높았다면 훨씬 재미있게 볼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쉬운 부분...전차 좋잖아 전차!
그러고 보니 전차전의 묘사 자체를 한 라노베가 거의 없지 않나요?
이거...블루 오션이였거늘 너무 대충 쓰고 버린 것 같은 느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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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대한 비밀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메인스토리에 대하여.
상권은 너무 산만해서 영 집중이 안 됐는데, 하권은 다행히 그런 게 없었지요. 진실에 다가서는 느낌, 그럴수록 뭔가를 잃어가는 처절함이 되게 매력적이었음!
천국에 대한 설정이 지금까지의 분위기에 비해 너무 초차원적이라 멍해지는 것도 참...그래요, 이렇게 스케일에 압도당해야 아키타 요시노부죠! 단순한 물리적 신세계의 문이라기 보단, 형언할 수 없는 이계...저승의 이미지랄까...뭔가 크툴크툴한 그런 느낌? 이해불가능의 영역? 갈수록 하나 둘 헤어지며 처절해지는 작품 전개와 이런 이계에 대한 불안한 느낌이 겹치며, 덕분에 마지막 엔딩은 LCL엔딩도 각오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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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마지막의 처절한 분위기 좋았어요. 좀 허망한 느낌까지 들었지만, 그런 뻥 뚫린 허전한 느낌이 더욱 작품의 파멸적인 전개의 맛을 돋궈줬음. 빌리는...마지막까지 순박하고 충실한 아우였습니다...ㅠㅠㅠㅠ 롱스트라이드와의 마지막 결전도 되게 좋았고요.
신에 회의를 느낀 목자가, 세계를 경멸하게 된 악당이, 천국을 원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순리. 하지만 결국 천국의 문턱에서 자신의 업보에 발목을 잡히고...언제나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여기던 롱스트라이드는, 작품에서 처음으로 보여 준 삶에 대한 집착 때문에 패배하게 됩니다. 블랙 라군 도쿄편도 이런 이야기였지요?
아 이런 상징적이면서도 찡한 전개 참 좋음...느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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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진짜 파멸적 에너지가 넘실거리던 클라이맥스인지라, 마지막에 아키타 치고는 나름 안일하면서도 즐거운 해피엔딩이 나온 것은 진짜 의외 ㅋㅋㅋ 그래도 불만 같은 거 없네요. 왜냐면...아키타 씨는...제 취향에 비해서는 항상 좀 너무 짠돌이였으니까요! 이 정도로 아키타답지 않게 긍정의 에너지를 풀어내주는 쪽이, 내게는 더 맞음!
너무 무리했다면 짜증냈겠지만, 뭐 이 정도면 개연성도 충분하고~
우리 이제 복수도 완료했으니, 천국의 이해할 수 없는 고상하고 신묘한 행복 따위 버리고, 세속적인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기로 해요~
솔직히 천국 너무 형언할 수 없는 수상함이 느껴진달까...LCL용액이 되는 느낌 아닌가요?! 요새는 그것도 나름 좋은 결말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만(...) 세상에 깊은 애착이 남아 있고, 즐거운 동료들이 있는 존재가 선택하기에는 너무 쓸쓸한 결말이라고는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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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마지막까지 연애 없는 게 진짜 천상 아키타 작품이네요! 아오...끈적끈적한 감정 교류 없이, 명확한 연애과정이나 결과 전부 X인 게 참...보통 윌리엄과 헤어질 때나, 재회장면 정도면 키스신 하나나 둘 정도는 넣어주지 않나요? 야 임마 역자의 기분에 나도 절절히 공감이 간다고 아키타! 이 로맨스에 더럽게 쨰쨰한 인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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